현대자동차그룹이 노면소음과 반대되는 음파를 만들어 소음을 줄이는 RANC(Road-noise Active Noise Control) 기술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기존 NVH 기술의 한계를 뛰어넘어 한 차원 높은 정숙성을 구현한 이 기술의 원리에 대해 알아봤다.
자동차의 안락함을 결정하는 요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고급스러운 소재와 화려하고 인체공학적인 디자인, 편안한 승차감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정숙성이다. 제 아무리 호텔 스위트룸 같은 안락한 승차감과 고급스러움을 갖춘 자동차라 하더라도 시끄럽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자동차 소음의 종류와 노면소음의 특징
자동차에서 발생하는 소음의 종류는 다양하다. 엔진을 비롯한 구동계에서 올라오는 소음, 차가 주행함에 따라 공기의 저항으로 인해 발생하는 풍절음, 그리고 타이어가 노면과 접촉할 때 발생하는 노면소음이 대표적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귀로 들을 수 있는 가청 주파수는 20~20,000Hz다. 이 중 자동차의 소음은 20~10,000Hz 사이에서 존재한다. 보통 500Hz를 기준으로 그 이하는 저주파, 그 이상은 고주파로 나눈다. 저주파 대역의 소음은 다시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20~150Hz는 부밍(booming)음, 150~250Hz는 타이어 공명(cavity)음, 250~500Hz는 럼블(rumble)음으로, 주로 타이어와 아스팔트 노면이 만날 때 생기는 노면소음에 속한다. 그리고 500Hz 이상 대역의 고주파는 자동차 실내의 에어컨과 통풍 시트 작동음, 그리고 풍절음 등이 해당된다.
위 소음 중 노면소음은 주행 중 노면 요철과의 충격으로 발생한 진동이 타이어와 서스펜션, 차체를 거친 뒤 실내 공기 중으로 퍼지면서 발생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주로 500Hz 이하의 저주파가 노면소음에 해당된다. 또한, 노면소음은 60~80km/h, 즉 실 운전영역 대에서 자주 발생하기 때문에 승객이 가장 빈번하게 마주치는 소음이기도 하다. 인간이 이러한 저주파 소음에 자주 노출되면 스트레스, 피로감을 겪게 되고 심할 경우 공황장애를 경험하기도 한다. 그래서 노면소음은 차의 정숙성 뿐만 아니라 승객의 건강을 위해서도 꼭 개선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를 개선하기는 쉽지 않다.
기존의 소음 제어 기술
소음의 원인이 다양한 만큼 소음 제어 기술 또한 그에 못지 않게 많다. 지난 자동차 역사에서 가장 많이 쓰이고 현재도 가장 보편적으로 쓰는 기술은 무언가를 덧붙이는 것이다. 엔진소음을 막기 위해 후드 안쪽, 그리고 엔진룸과 실내 사이의 격벽에 흡음재와 차음재를 더하는 것 등이 대표적이다. 흡차음재는 노면소음을 막기 위해 차체 바닥에 적용되기도 한다. 이러한 기술을 수동형 소음 제어(Passive Noise Control) 기술이라고 한다.
차체를 구성하는 금속과 금속이 만나는 부분에 부드럽고 탄성 있는 재질의 충격흡수제를 더해 진동을 줄이 기술도 있다. 차체 강성을 강화하는 것도 근본적인 소음 차단 기술 중 하나다. 차체가 강하면 진동에 의한 떨림이 적고 소음 억제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풍절음을 막기 위해 앞 유리와 옆 유리를 이중접합 방식으로 만들기도 하는데, 이러한 것들을 모두 수동적 소음 제어 기술로 볼 수 있다.
기존 소음 제어 기술의 한계
위와 같은 방법들을 잘 활용하면 자동차의 정숙성을 크게 높일 수 있지만 단점도 있다. 부품을 많이 사용할수록 정숙성이 좋아지지만 동시에 무게도 늘어난다. 자동차의 연료소비효율(이하 연비)을 높이고 배출가스를 줄이기 위해 경량화가 무엇보다 중요한 오늘날의 흐름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모습이다. 순수하게 소음 저감을 목적으로 부착되는 부품은 상상 이상으로 많다.
또한, 저주파의 소음은 완전히 막기가 힘들다. 잔존하는 소음을 막기 위해서는 휠과 차체 강성 보강 등이 추가되고 차의 중량 뿐 아닌 비용까지 상승시키게 된다. 이는 곧 연비 저하 및 원가 상승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수동적인 소음 제어 기술에서 벗어나, 아예 소음 저감을 염두에 두고 차를 디자인하거나 설계하기도 한다. 차체를 공기역학적으로 디자인해 풍절음을 근본적으로 차단하는 것도 그 중 하나다. 하지만 이 또한 차의 중요한 디자인 포인트를 포기하거나 양보하는 등의 문제를 갖고 있다.
능동형 소음 저감 기술, ANC의 등장
그래서 등장한 소음 저감 기술이 능동형 소음 저감 기술인 ANC(Active Noise Control)다. 기아자동차 K9, 현대자동차 팰리세이드에도 적용되어 국내 운전자들에게도 익숙한 이 기술은 65~125Hz 대의 저주파 소음을 줄여준다.
헤드폰 같은 음향관련 기기에는 ANC가 이미 널리 쓰이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자동차 소음처럼 메커니즘이 복잡하지 않다. 제어를 해야 할 위치도 좌우 각각 1개 뿐이고 스피커로부터 소리를 듣는 고막까지의 거리가 매우 가까워 연산해야 할 데이터 양도 적고 제어가 용이하다.
기존의 자동차에 적용된 ANC 기술은 엔진소음에 국한됐다. 엔진소음은 예측 가능한 범위 내에서만 발생하며 엔진의 한계 회전수가 정해진 범위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엔진의 연소시기 또한 미리 알 수 있기 때문에 소음이 언제 발생할지도 예측할 수 있다.
반면, 노면소음을 차단하기에는 처리해야 할 타이어 종류, 노면 상태 등 변수가 너무 많기 때문에 ANC 기술을 적용할 수 없었다. 몇 년 전에 노면소음을 줄여주는 기술이 타 자동차 메이커에서 나온 적은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특정 주파수의 소음만 대응이 가능한 기술이었던 탓에 넓고 다양한 영역대에서 발생하는 노면소음을 잡을 수는 없었다.
기존의 수동적인 소음 제어 기술과 비교했을 때, ANC를 통해 자동차의 정숙성이 좋아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전히 한계가 있었다. 현대차그룹이 RANC(Road-noise Active Noise Control)라는 새로운 소음 제어 기술을 개발한 것은 기존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돌파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기존 기술의 한계를 뛰어넘은 새로운 소음 제어 기술, RANC
RANC는 Road-noise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주행 시 발생하는 노면소음을 저감시키는 기술이다. 시스템은 가속도 센서, DSP(Digital Signal Processor, 음향신호 분석을 위한 제어 컴퓨터), 마이크, 앰프, 오디오 등으로 구성된다. 시스템을 최대한 단순하게 하기 위해 오디오는 별도의 오디오 시스템이 아닌 차에 원래 내장된 오디오를 활용한다.
원리는 다음과 같다. 먼저 가속도 센서가 진동의 전달 경로에 위치해 노면소음을 유발하는 진동을 취득한다. 여기서 진동 전달 경로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한 가속도 센서의 위치가 굉장히 중요하다. 연구팀은 수많은 테스트를 통해 최적의 센서 위치를 찾을 수 있었다. 이는 RANC의 기술 특허 요소이기도 하다.
이렇게 취득한 진동 정보를 DSP로 보내면 DSP가 이 진동을 분석해 실내로 유입되는 소음을 예측하고 그에 반대되는 위상의 음파를 만들어낸다. 그렇게 반대 위상의 음파가 실내로 전파되고 노면소음과 만나 소음이 상쇄된다. 또한 소음이 저감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실내에 설치된 마이크가 소음 수준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해 DSP로 보내주고 DSP는 이를 통해 반대 위상을 끊임없이 튜닝하면서 실내의 소음을 완벽하게 제어한다.
이 모든 과정은 소리보다 빠르게 이뤄져야 한다. 소리는 공기 중에서 1초에 약 340m를 이동하는데, 서스펜션과 차체의 재질을 고려하면 전달 속도는 더욱 빠르다. 자동차의 실내공간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통 노면소음이 승객에게 닿기까지는 약 0.009초가 걸린다. 그러나 RANC가 진동과 소음을 파악해서 제어음을 만드는 데에는 불과 0.002초 밖에 걸리지 않는다. 음속보다 빠른 제어를 통해 RANC는 승객이 노면소음을 듣기 전에 이를 상쇄시켜준다. 거의 찰나에 가까운 시간 안에 실시간으로 소음을 측정하고 분석해 반대 위상의 소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RANC의 핵심 기술이다.
이처럼 모든 과정이 찰나의 순간만큼 짧은 시간 안에 이뤄질 수 있는 것은 결국 RANC를 제어하는 전기 신호의 속도가 빛의 속도(1초에 약 30만 km를 이동한다)로 이동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확한 알고리즘과 기술만 갖고 있다면, 거리에 상관없이 소음을 제어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해 RANC는 센서의 계측 지연 시간, 제어기 내 연산 시간, 각 부품간의 신호 전달 인터페이스에 걸리는 시간을 최소화했다. 그 결과, 소음이 탑승객의 귀에 전달되기 전, 제어음이 귀에 도달할 수 있다.
RANC는 기존의 흡음재와 ANC로 잡아내지 못했던 저주파 대의 노면소음을 획기적으로 줄여준다. RANC를 적용하면 약 3dB의 노면소음 저감이 가능하다. 이는 누구라도 쉽게 소음 저감을 체감할 수 있으며, 한 체급 더 높은 차의 정숙성을 갖춘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포장된 지 오래된 아스팔트 노면에서 그 효과가 크다. 또한, 교량의 연결부 같은 요철의 충격 후 발생하는 부밍 소음 등을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있다. 이는 RANC를 적용하지 않았을 때와 비교해 소음 에너지를 절반 수준으로 낮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누구라도 소음 저감을 체감할 수 있다. 이 결과는 노면 상태, 차속, 좌석 위치 등 가능한 한 모든 조건을 고려해 현대차그룹 연구소에서 실시한 테스트로 검증됐다.
100년이 넘게 이론으로만 존재한 기술을 현실로 만들어내다, 현대차그룹 NVH 리서치랩
사실 ANC의 이론은 100여 년 전에 이미 나왔다. 그러나 측정과 분석 기술이 뒷받침되지 못했기때문에 이론으로 밖에 존재할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예측 가능한 엔진소음 정도에만 겨우 적용될 수 있었다.
불규칙한 노면 특성, 그리고 네 바퀴에서 올라오는 노면소음을 측정하고 반대 음파를 만들기 위해서는 엄청난 연산 과정과 대용량의 데이터 처리가 필요한데, 기존 기술로는 이를 해결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강덕 연구위원이 이끄는 현대자동차그룹의 연구개발본부 NVH 리서치랩은 RANC라는 이름의 노면소음 제어 기술을 세계 최초로 개발해냈다.
NVH 리서치랩은 선행 단계에서 KAIST 박영진 교수 연구실, 번영, ARE, 위아컴 등과 협업해 순수 국내 기술로 RANC 시스템을 개발했다. 그리고 최종 양산 단계에서는 오디오 전문 업체인 하만과 협업해 최적의 성능과 안정성을 확보한 시스템을 개발해내는데 성공했다. 선행 단계에서 산학협력 오픈이노베이션 형태로 진행했으며, 양산 단계는 글로벌 차량 오디오 전문업체인 하만과 협업해 완성도를 높였다.
"선행 개발 당시 아날로그 센서를 이용해 초기 시험을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이 센서의 가격만 2,000만 원을 넘었죠. RANC 양산을 위해 경제성 있는 센서를 찾아봤지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디지털 센서의 적용이었습니다. 2년 동안 진행한 아날로그 방식을 버리고 모든 걸 새로 시작해야 했죠. 디지털 센서부터 가속도 센서, 마이크, 제어기까지 디지털 방식으로 전부 새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이강덕 연구위원의 말이다.
NVH 리서치랩이 RANC 기술을 개발하는 데에는 약 6년이 걸렸다. 위에서 언급한 아날로그 방식에서 디지털 방식으로의 변경 외에도 노이즈 처리, 연산 딜레이 축소 등의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숱하게 많은 밤을 지새야 했다. 그리고 그 결과, 노이즈를 줄이고 연산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인 RANC를 완성했다.
RANC의 장점과 발전 가능성
이처럼 RANC를 개발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차그룹이 멈추지 않은 것은 RANC의 가능성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탁월한 소음 제어 능력 외에 현대차그룹이 주목한 RANC의 장점은 경량화다. 가속도 센서, 제어기, 마이크로 구성된 RANC 시스템의 무게는 약 1kg에 불과하다. RANC 만큼의 소음 제어 효과를 얻기 위해 흡음재, 댐퍼 등을 적용할 경우에는 이보다 무게가 훨씬 늘어나게 된다. 때문에 RANC를 쓸 경우 방음은 물론, 경량화라는 토끼까지 잡을 수 있다.
또 하나는 RANC가 전기차의 정숙성을 높일 수 있는 큰 무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연기관 기반의 자동차는 공회전 상태부터 엔진소음이 들려온다. 이로 인해 노면소음과 풍절음이 상대적으로 작게 들린다.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노면소음은 보통 60~80km/h의 속도에서 사람이 인지할 수 있다.
그러나 전기차는 파워트레인의 소음이 거의 없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노면소음이 크게 들릴 수밖에 없다. 주행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원치 않는 노면소음을 듣게 되는 것이다. 풍절음도 마찬가지다. 내연기관 기반의 자동차에서는 100km/h부터 풍절음이 들리기 시작하지만, 전기차에서는 80km/h 내외의 속도부터 풍절음을 경험하게 된다.
다가오는 전동화 시대에 노면소음과 풍절음은 차의 정숙성을 높이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하는 과제다. RANC가 향후 전기차의 소음 제어 기술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기대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현대차그룹은 노면소음에 그치지 않고 500~5,000Hz의 주파수 음역을 가지는 풍절음에도 능동형 소음 저감기술을 적용하기 위한 기술도 개발 중이다. 현대차그룹은 RANC기술을 향후 출시할 제네시스의 신차에 최초로 적용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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